HOME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사이트맵

인기검색어 : 9 마음 ccm 8 샬롬 

 

 
 

 

Untitled-3.gif
 

 HOME > 커뮤니티 > 홍보게시판


예배인가 쇼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그렇네여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댓글 2건 조회 2,032회 작성일 05-09-01 13:01

본문

할렐루야!!!

주님의 지체인 작은 교회에서 찬양으로 섬기며 느끼는 문제입니다.
찬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평안함이라 얼마나 대단한지,
그러나 그뒤에 숨어있는 교만함이란 것 또한 얼마나 큰 유혹인지...
하나님만을 찬양한다하며, 높여 드린다하지만, 마치 자신이 무엇인양 할 수 있고,
줄 수 있는 존재처럼 우쭐대는 교만함과 명예욕의 집요한 유혹이란 것. 루시퍼가 그랬듯이
찬양사역자들이 한번쯤은 빠져봄 듯한 딜레마일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웅장한 스케일, 화려한 조명, 입술에 붙은 잘 다듬어진 멘트들. 헐리우드 액션만큼이나 큰 장엄함이 있어야만 예배고 찬양인 듯, 그래야 뭔가 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우리 예배들.
예배도 아닌, 찬양도 아닌, 집단 퍼포먼스로 끝나는 그런 집회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후원해야 할 후원자,
또는 사회 저명인사가 있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어느 인기 가수가 믿는 예수님,
어느 사회 저명인사가 기도하는 예수님,
세계적 유명한 운동선수가 찬양하는 하나님.
그분은 과거 나귀 새ㄲ ㅣ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이제는 저명인사의 명성을 등에 얹고 나아가기 위해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주님이 빛비춰 주셔서 우리 모두가 주님을 주님되게, 주님의 자리에 다시 높여드렸음 하는 간절한 마음에 이글을 올립니다. 무슨 학적인 변론을 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4:33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해 없으시고 한번 깊이 숙고해볼 문제라 생각되서... 


이 글은 A.W. 토저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3부를 앞에 두었습니다. 1부부터 보는것이 순서겠지만


[3부] 사이비 예배를 중단하라

11장 쇼비지니스 연예오락이 예배를 타락시키고 있다

연예오락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실패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의 훈련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세상적 판촉 활동의 도입,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결국 이런 비극적 결과들을 낳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와 교회는 질적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양적 팽창을 추구하고,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과장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연예오락과 흥밋거리에 따라서 운영되는 교회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참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주일마다 사이비 기독교의 자극으로 짜릿함을 느껴보려는 '세례받은 속물 집단'은
참신자들의 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해도 그들은 참그리스도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


종교적 쇼를 중단하라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들은 경축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하는 것뿐이다.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참기쁨이 없는 곳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그 많은 카우벨(무용 음악에 쓰이는 타악기)와
연주용 톱과 쇼와 영화와 흥미로운 도구들을 사용하고,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리즘을 경계하라

아마추어들은 훈련받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았으며
영적이지 않은 야심에 찬 수다쟁이가 신앙의 길로 돌아선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이다.

참예배자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예배를 드리려는 자는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가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어떤 것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연예오락이 아니다

거룩함 가운데 주 예수님께 예배하는 것은 방해할 수도 있는,
추하고 보기 흉하고 불경스러운 것들이 우리 마음에서 제거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교회 안의 연예오락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 위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결국 그들의 견해도 십자가 아래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얄팍하고 세상적인 지도자들은 심지어 성소 내에서조차 연예오락을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십자가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영적인 재앙을 불러들이는 일이며,
어린양이 사자처럼 분노하시도록 만드는 일이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공연자들이 공연하고 관객이 돈을 지불하는 종교 극장이 아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온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들이다.


교회 안의 이단

종교적 연예오락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너무나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이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전 세계 수백만의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적 연예오락에 몰두해 있다.


세상 프로그램들

세상의 프로그램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게 바쳐지고 있으며
신앙적 가치는 도처에서 홀대받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어린애 같은 입술에 음식을 떠먹여주시기 원한다.
이런 사람은 성경이 우리에게 온전함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죄악된 쾌락들

미국의 기독교 소설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성(性)을 이용한다.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만일 낭만과 기독교를 결합시켜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면 순수 기독교 소설을 읽지 않을 보통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읽고 복음에 접하게 될 것이라는 얄팍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육욕적 충동과 성령님의 깊고 감미로운 감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애, 즉 에로스가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죄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준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는
우리의 올바른 감정이 질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수단들

교회에서도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지도적인 위치에서 일한다.
그러다보니 성령님의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식되거나 사용되지 못한다.
우리의 교회는 성령님이 비추어주시는 빛으로 밝혀져야 한다.

최근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얄팍한 비성경적 수법들은 성령님을 슬프게 만든다.
우리는 빛을 약화시켰고, 성전 진설병의 떡을 말라버리게 했다.
분향단에서는 향기가 사라졌다.
많은 교회가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예배가 밀려난 자리에는 '프로그램'이라는 이상하고 낯선 것이 들어와 있다.

본래 무대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지혜로 예배에 적용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이제는 아예 예배로 통하고 있다.


12장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라


선전을 조심하라

마귀는 점점 우리를 세뇌하고 조종하며 교회에 그의 생각을 은근히 주입시키느라 바쁘다.
교회는 지금 세뇌당하고 선전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그들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그것이 국가의 법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고 애쓰지 말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기독교는 입으로는 신약의 말씀을 늘 되풀이하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적 가치관에 동조하고, 행위로는 세상의 방법들을 열심히 따른다.
그리스도는 단지 '저 위에 계신 마음씩 좋은 분' 정도로 제시된다.


인기가 숭배의 대상이 된 사회

오늘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점을 얘기하고, 좋게 생각한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인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 사업상 거래처 사람들, 직장 동료들, 친목회 친구들의 호감을 잃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은 친구들을 잃지 않으려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배신하다.


프로그램의 독재

교회에서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을 때,
교회는 너무나 진부한 곳으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판에 박은 것'이 독재적 지배력을 갖게 되고,
우리는 다음 주일에, 아니 다음 달에, 내년에 일어날 일까지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 프로그램으로 우리 자신을 무감각, 무감동으로 철저히 길들어버렸다.


13장 껍데기 예배는 가라

너무 편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신자들이 거의 없는 이유는
이 땅을 너무 편하게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그다지 떠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며 금과 은을 쌓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천국의 길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방법들에 따라서 그것들을 누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외형을 좇는 사람들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들을 증거로 내세우는 방법이 인간의 지혜를 만족시켜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방법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내실이 있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언제나 얄팍한 껍데기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 문제의 본질은 예배가 형식주의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이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메마른 예배

소위 복음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최근 여러 가지 종교적 소도구나 음향이나 영상 기기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개신교 조상들은 이런 소도구나 기기들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활동의 여지를 좀 더 많이 마련해드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회중이 그리스도의 임재는 더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이런 것들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

물고기가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쳐 가야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류에 맞춰 흘러가는 당신에게 사람들은 당신이 아주 경건하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며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당신은 시류에 따르든지 아니면 믿음의 선진들처럼 그것들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사탄은 교묘한 논리로 우리를 속이는 데 능하다.
우리는 그럴듯한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타협하지 말라

우리는 세상을 축복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지,
세상과 타협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유익을 주려는 사람은 큰 능력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값싼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값싼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


14장 인간에게 아첨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하라

온전한 메시지를 전하라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개종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멍들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방법이나 다 사용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에 따라야 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하며, 전도 대상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앞세우라

신자들과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철저히 구별되고 바쳐져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그들은 끈질기게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현대의 풍조에서 돌아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아닌, 영적 세계에서 크신 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세상이 제공하는 도움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후원해야 할 후원자,
또는 사회 저명인사가 있어야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어느 인기 가수가 믿는 예수님,
어느 사회 저명인사가 기도하는 예수님,
세계적 유명한 운동선수가 찬양하는 하나님.
그분은 과거 나귀 새ㄲ ㅣ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이제는 저명인사의 명성을 등에 얹고 나아가기 위해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라

현대의 전도자들은 새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가 결코 불쾌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현대의 기독교가 전하는 새로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절망감을 느끼게 하려하지 않는다.


15장 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재미를 위한 기독교

예수님을 섬기면서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기독교는 '재미를 위한' 기독교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연예오락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태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 단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또 하나의 다른 연예오락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잘못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종교적 장난감을 버리라

복음주의 신자들 중 대다수가 이 세상을 더 이상 전쟁터로 보지 않고 놀이터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도 보고 세상도 본다.
그들은 아주 밝은 얼굴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즐거운 것들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런 인생관만큼이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종교 게임

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이를 하듯이 '종교 놀이'를 한다.
교회에도 '경건한 말들을 늘어놓는 게임'을 즐기기 위한 장과 규칙과 게임 도구들이 존재한다.
그 게임에 열성적인 평신도들과 교역자들이 있다.
그들은 돈을 내면서 그 게임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몸으로 출석해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과 인격은 신앙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게임 후에도 여전히 삶의 중요한 부분들은 변하지 않았고,
옛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며, 여전히 옛 아담이 삶을 지배한다.


세상 것들을 버려라

지금은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구되는 때이다.
현대 교회는 '재미'(fun)를 그들 종교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냉담한 사람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경건의 분야에서는 열정이 식어버린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인데, 바로 이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다른 일들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열성적이고 의욕이 넘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우울하고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활동에 몰입하거나
종교적 놀이에 의지하지만 실상 이런 방법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는 내면적으로 승리하지 못했고 오히려 패배적이고 우울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지나치게 많은 활동들

우리는 마치 클럽을 운영하듯이 교회를 운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즉시 자신이 거룩한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고 느끼고 얼굴을 바닥에 댄 채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아무리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것이 단지 종교적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의 재능을 사용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없이 인간이 인간의 일을 하는 것뿐이다.


예배가 반드시 시끄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야단 법석을 떠는 것이 반드시 예배는 아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복음전도자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오늘날 교회는 헌신이 아닌 야단법석을 강조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외향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성령님을 기억하라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들을 운영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나
안타깝게도 성령님이 그 주체가 되지 못하며, 주님이 책임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을 끌어모기 위해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방법,
(심지어는 성경에 반하는 방법들까지도)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품이 되어버린 반면, 정말 필요한 영원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것이 비극이다.


활동 중독증 활동

중독증은 기독교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그다지 유익이 되지 못한다.
신앙의 표피만 건드리고 본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통속적인 활동이 너무 많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종교적 활동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실상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영적인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무익한 활동에서 돌이켜야 한다.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참매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제가 무엇인지 정말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참교제에 대한 성령님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방향을 잃은 교회

방향을 잡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그럴싸한 것들'이라면 무조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에 발을 맞추라고?

현재 유행하는 착각 중의 하나가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요란스러운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게 만든 대단한 착각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전도대상자의 영혼에게 참으로 위험스럽고 악한 것이다.


16장 할리우드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배우라

할리우드가 교회의 스승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예루살렘보다는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정도로
세상의 정신 및 세상적인 방법들과 맞닿아 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성인들보다는 오늘날의 연예계 스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합당하지 않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대중음악이
참기독교의 순결한 위엄과 반짝이는 순수성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가련한 잡종

세상과 교회의 진정한 연합은 불가능하다.
교회가 세상과 짝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참교회가 아니다.
세상에게는 경멸의 대상이고 주님에게는 가증스럽고 가련한 잡종일 뿐이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성도들'을 배출하지 못한다.


세상에 미혹된 교회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관심과 동기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주는 깊은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예배의 언어를 통해서 예배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예배의 영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예배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배와 교회생활을 좀 더 견디기 쉽도록 고안해 낸 종교적 오락과 놀이에 의지한다.


인기를 얻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 중에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거나,
가장 시끄러운 사람을 가장 훌륭하고 멋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습관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인기가 곧 탁월함의 증거라고 믿는다.


세상의 방법인가? 하나님의 방법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방법에 의지한다.
우리는 역사적 안목과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활동과 자신의 인간적 열심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 결과, 성경의 방법은 밀려나서 사라지고 만다.
교회 스스로 구멍을 뚫어버렸고 그 구멍으로 세상의 방법들이 흘러들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불경스럽고 불행한 것들이 교회와 예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의 강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올바른 소식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는 허영의 소리를 향해 열려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기를 내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1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예배 행위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시45:11)


전폭적인 하나님 경배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 아닌 것을 예배로 착각하는 사람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여 그들을 착각에서 구출해주어야 한다.


마술적 힘에 대한 유혹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우리는 쉬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생각까지 하나님의 성소가 되도록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소가 되도록 하라.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모든 시간과 장소를 하나님께 넘겨드려라.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올바르게 예배할 것이고, 그분은 그 예배를 받으실 것이다.


2장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인간의 존재 이유

하나님의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서 하신 모든 것,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신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전혀 없어야
비로소 나의 예배가 그분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을 참되고 거룩하게 드리려는 결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을 위한 예배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다!
참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찾아오셔서 예배의 영을 허락하셔야 우리가 참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보다 예배가 먼저이다.

하나님은 일꾼을 갖기보다 예배자를 갖기 원하신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모순이다.


이렇게 예배하라.

우리가 월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토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마음속의 제단

영적 세계의 제단과 현실 속에서의 예배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려면
바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제단을 세워야 한다.

지식, 경이, 사랑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없이는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예배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경험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배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교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성숙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이 영혼을 구원할지는 몰라도, 성숙한 예배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갈망과 하나님의 갈망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하나님도 갈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 갈망이란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영원히 결단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이다.


[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라

3장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참예배가 아닌 예배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참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가인에게서 배우는 교훈 구약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데,
가인의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둘째,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


공허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
참예배가 되려면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
예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준엄한 메시지

성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4장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인 집중력

영적인 집중력을 기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나는 우선 한 달만이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조용히 말씀을 묵상해볼 것을 강력히 권한다.


대가를 지불하는 영성

성공하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과 마주칠 때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 육신의 눈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우리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 들려온다.
그 음성은 우리의 대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바쁘거나 너무 완고하여 그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 깊게 듣는 자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5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하나님 임재의 중요성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서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배의 시작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

만일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근거는 없다.
그들이 그토록 큰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일했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성막이 가르쳐주는 영적 진리

구약에 나오는 성막은 죄악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잘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집중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맛보고, 내적으로 느끼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임재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분의 임재를 단지 이론으로만 알고 있다.
현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위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위로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지위에 안주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 개인적인 체험의 부재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의 부족

대체로 경건한 두려움, 경외심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배요 사랑이며 경외이기 때문이다.


6장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분은 이기적이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변덕스럽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그분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즉시 알아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돌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보다 '예배하는 사람'을 먼저 찾으신다.
거룩하고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능력은 있으나 도덕적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일꾼으로 사용하실 만큼 '일꾼 기근'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돌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수많은 천사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다른 모든 것들로 이끌었으되, 우리를 예배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해
우리는 중생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7장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부흥은 자정을 넘어서 찾아온다

다른 것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할 만큼 영적 갈망이 크지만 때때로 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자신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거나 기도의 응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는 늦도록 계속 기도한다.
그의 간절함은 그를 한밤중에도 교회로 오게 만든다.
부흥은 자정이 넘어서 찾아온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예배와 경외심

경외심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경외심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가식적인 음성으로 말한다고 해서 경외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신비적 요소

각 사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활동과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제3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예배보다 낭만에 빠진 사람들

복음주의적인 교회 어디서나 음란한 이 시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집회에서 부르는 많은 곡에서도 성령님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더 지배적이다.
그리스도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것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분에게 순종하거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최대한 그분의 면전에서 멀리 도망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는 사람들

하늘나라를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고
마음속 소유욕을 근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이처럼 복되게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아니다.
그 방법은 '싸움'이 아니라 '포기'였다.
모든 소유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하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복의 필요성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복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세상적이며, 낮은 도덕적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영적으로 냉랭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모하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감탄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숭모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을 그다지 어렵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경이감에 사로잡힌 채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듯이 의무적으로 경의를 표할 수는 있겠으나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분을 예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교회 예배

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숭모를 지겨워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타는 신자가 되라

신자들을 불타는 떨기나무가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들은 우리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불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
하나님을 만나는 위대한 체험을 통해 정화된 사람들이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9장 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라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본래 한 인격체는 다른 인격체들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격체 서로간의 온전한 '앎'(인식)이란 단 한 번의 만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방의 가능성을 전부 알려면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 위해 보내는 시간을 결코 낭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다.
더 많은 교육, 더 잘 짜여진 조직, 더 세련된 장비, 더 발전된 방법,
이런 것들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시선이 그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바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흔히 뒤따르는 현상은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는 것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복된 현상은 영적으로 새롭게 될 때 일어난다.


10장 나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송가 작가와 함께 드리는 예배

찬송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이 계시된 진리,
또는 성취된 사실을 보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찬송가는 그분의 음성에 대한 음악적 반향이다.
찬송가 작가들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높으심과 크심과 거룩하심에
경이감을 느낄 증도 그분에 대해 감탄했기 때문에 그것을 찬송으로 표현했다.
이런 찬송가는 부르거나 그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은사를 부여받은 위대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에 동참하는 일이다.


찬송의 타락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집회에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데는
과거에는, 성경책과 찬송가책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교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소도구와 장치가 동원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찬양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찬송가는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했던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잘못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교리는 찬송에 영향을 끼친다

찬송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것을 찬송 중에 깨닫는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선생들은 우리가 처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 다음으로는 할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나타나시기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댓글목록

초록바다님의 댓글

초록바다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 많은 글들을 옮기시느라 수고하셨네요~
토저의 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저도 이책을 읽고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지요...
우리 만족과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예배가 아니라
진정과 신령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더욱 요구되는 때 인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님 되시고 주님의 자리에서 높임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참사랑님의 댓글

참사랑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예수님께서 마지막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예배가 쇼가 되어버린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
예배가 만담이 되어버린 모습들, 이젠 교회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신 인간의 유머나 재치가 우선이 되어버린 한국교회. 많이 모여들면 부흥이라고 차각하는 이들~  부흥은 우리의 내면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한 회개함으로 부터 출발되어 지는데...., 주님은 지금도 믿는자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길 원하십니다. 예배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Total 1,243건 32 페이지
자유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778 악바리쏠 2064 09-24
777 또다른하늘 2303 09-21
776 김지현 2305 09-14
775 글로라 1534 09-14
774
찬양 댓글1
김은희 1641 09-11
열람중 그렇네여 2033 09-01
772 그렇네여 2368 08-31
771 날개그늘 1723 08-30
770 황필권 2016 08-26
769 핸샘 1816 08-23
768 핸샘 1671 08-23
767 핸샘 1582 08-23
766 최민우 2191 08-18
765 이지선 1554 08-18
764 와우ccm 1590 08-18

검색








     
 

방송국소개       제휴및광고문의       언론보도       개인정보취급방침       사이트맵       오시는길

 
 

136-853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46번지 M층 기독교인터넷방송국 와우씨씨엠        비영리단체등록번호 : 305-82-71411 (대표 김대일)

대표전화 : 02)6497-2969       이메일 : cyberdaeil@hanmail.net         Copyright ⓒ WOWCCM.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