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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토머스(Robert J. Thomas, 1836~1866) 선교사는 한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만큼 한국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이 땅에 생명을 바친 첫 개신교 순교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같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 토머스 선교사는 여러모로 준비된 선교사였다. 그의 성장 과정, 남긴 발자취가 그랬다. 그는 1857년 런던 대학에 입학한 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1859년에 대학 교수회에 휴학을 요청하면서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저는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특별한 교제는 기독교 역사의 빼어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 1859년에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 부흥이 웨일스에서 발흥했다. 당시 웨일스 사람이라면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휴학을 한 뒤 설교에 전념하던 토머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흥을 경험하고 중국 선교를 꿈꾸던 토머스는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1863년 12월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의 손을 잡고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 로부터 3개월 후 1864년 3월 24일에 그는 아내를 먼저 하나님 나라로 떠나보냈다. 그것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충격과 고통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시지 않았다. 얼마 후에 토머스는 선교의 열정을 회복하고 황해도 창린도에 도착해 2개월 반 동안 성경을 반포했다. 그리고 한국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토머스는 1866년에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입국했다가 순교했다. > 그러나 토머스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를 죽인 박춘권은 영주교회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조카 이영태는 예수님을 믿고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 3분의 2를 번역하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토머스 선교사가 건네준 성경 세 권으로 도배한 영문 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가 1907년 1월에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부흥이 임했던 장대현교회다. >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생명의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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